1 인류를 바꾼 선택
1954년 미국 워싱턴. J. 로버트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는 보안 청문회에 출석한다.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개발을 이끌었지만 공산주의자라는 의혹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청문회와 12년 전 원자폭탄 개발을 위해 국가 기밀로 진행된 맨해튼 프로젝트를 교차로 보여주며 시작된다.
오펜하이머는 1942년, 군부의 요청으로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된다. 그는 뉴멕시코 로스앨러모스에 비밀 연구소를 설립하고,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들을 모아 원자폭탄 개발에 착수한다. 당시 나치 독일도 핵무기 개발을 진행 중이었기에, 이는 전쟁 승리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1945년 7월 16일,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한다. 그러나 독일이 이미 항복한 상황.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오펜하이머는 깊은 죄책감에 빠진다. 이후 그는 수소폭탄 개발을 반대하며 정부와 갈등을 빚게 된다.
2 놀란은 놀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IMAX 카메라로 압도적인 영상미를 구현했다. 특히 원자폭탄 폭발 장면은 실제 핵실험 자료를 참고해 제작됐다. CG를 최소화하고 실제 크기의 세트와 특수효과를 활용해 사실감을 극대화했다. 촬영 과정에서 1940년대 카메라 렌즈를 사용해 시대적 분위기도 완벽하게 재현했다.
루드비히 괴란손의 촬영은 시간의 흐름을 색감으로 표현했다. 보안 청문회는 차가운 흑백으로, 맨해튼 프로젝트는 따뜻한 컬러로 촬영해 대비를 이뤘다. 제니퍼 레임의 편집은 복잡한 시간 선을 명확하게 전달하면서도 긴장감을 유지했다.
영화의 사운드 디자인도 주목할 만하다. 루드비히 고란손은 원자 핵분열의 순간을 청각으로 표현하기 위해 독특한 음향 효과를 개발했다. 이에 더해진 한스 짐머의 음악은 과학의 성취와 도덕의 공포를 절묘하게 융합했다.
3 역시 킬리언 머피
킬리언 머피는 오펜하이머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천재 물리학자의 지적인 면모와 함께 양심의 갈등을 겪는 인간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특히 트리니티 실험 성공 후 고뇌하는 장면은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 머피는 이 역할을 위해 실제 오펜하이머의 강의 녹음을 연구하고 물리학 이론을 공부하는 등 철저한 준비를 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루이스 스트라우스 역으로 변신했다. 그는 정치 야망과 개인의 원한으로 오펜하이머를 몰아세우는 스트라우스를 맛깔나게 표현했다. 에밀리 블런트는 키티 오펜하이머 역을 맡아 과학자의 아내가 겪는 고독과 불안을 연기했고. 진 타틀록 역의 플로렌스 퓨는 오펜하이머의 복잡한 감정선을 효과적으로 보완했다.
매트 데이먼이 연기한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군사 지도자와 과학자 간 미묘한 권력관계를 잘 보여줬다.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는 에드워드 텔러 역을 맡아 오펜하이머와의 이념 대립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4 천재 과학자의 말할 수 없는 고뇌
영화는 실존 인물의 증언과 기록을 충실히 반영했다. 오펜하이머의 회고록, FBI 문서, 보안 청문회 기록 등 방대한 자료가 활용됐다.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모습도 당시 사진과 설계도를 바탕으로 재현됐다. 과학자들의 실험 과정과 토론 장면 또한 실제 기록을 바탕으로 구성됐다.
영화는 현대 사회에 중요한 다방면의 화두를 던진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윤리적 책임, 국가 안보와 개인의 양심, 정치 이념과 학문의 자유까지. AI와 생명공학이 발전하는 현대에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문제를 제공한다.
영화는 흥행과 작품성 모두에서 성공을 거뒀다. R등급 영화 최초로 9억 달러의 수익을 돌파했으며, 아카데미상 13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3시간의 긴 러닝타임이 무색할 만큼 관객들은 한 과학자의 선택이 바꾼 세계의 운명과 그 속에서 방황하는 과학자의 내면 갈등에 빠져든다.
영화에서 오펜하이머는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기타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오펜하이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 중 한명이었지만 그 천재성이 낳은 결과는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무기였다. AI를 필두로 최첨단 과학의 발달하는 지금 이 시대가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워지는 이유다. 영화를 통해, 과학의 진보와 인류의 양심은 영원한 딜레마임을 다시금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