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로운 독재의 시작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대한민국은 혼란에 빠진다.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을 겸직하며 과도 정부가 구성된다.
전두광 보안사령관은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와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씌워 체포하려 한다. 그는 하나회를 등에 업고 최전선의 전방부대까지 서울로 불러들이며 반란을 준비한다.
작전명 '생일집 잔치'. 전두광은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김진기 헌병감을 포함한 주요 인물들을 만찬에 초대한다. 저녁 6시 50분, 전두광의 지시를 받은 보안사 수사관과 헌병대 병력 65명이 정승화 총장 공관에 난입한다.
수도 서울은 아군과 적군의 구분이 모호한 혼전 속으로 빠져든다.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은 수경사 병력을 동원해 이를 저지하려 하지만, 전두광이 군 내부에 심어둔 하나회 세력들이 이태신의 작전을 방해한다
새벽 0시, 3 공수여단이 특전사령관을 연행하고, 새벽 2시에는 경복궁이 점령된다. 5 공수여단 400여 명이 효창운동장에 집결하고, 새벽 3시 30분에는 노태우의 9사단 병력 1,300명과 탱크 35대가 중앙청으로 진입한다
이태신은 끝까지 전두광을 막으려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전두광은 군 내부의 지지 세력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다. 이로써 10.26 이후 피어오르던 '서울의 봄'은 끝나고, 이는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군부 독재의 시작점이 됐다.
2 그 때도 돌아가다
제작비 233억 원이 투입된 '서울의 봄'은 1979년 서울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한남대 사범대학은 수도경비사령부로, 탈메이지기념관은 특전사령부로 변신했다.
이모개 촬영감독은 참고 이미지 없이 "그날로 가보자"는 콘셉트로 촬영을 진행했다. 투쟁의 순간에는 레드톤, 냉철하고 담담한 구간에서는 블루톤으로 대비를 줬고, 노이즈를 조정해 묵직한 질감을 표현했다. 이성환 조명감독은 일반 조명기를 배제하고 자동차 헤드라이트, 서치라이트, 경광등, 가로등 등 실제 광원만을 활용해 현장감을 살렸다.
음향 작업에도 공을 들였다. 라이브톤 스튜디오는 총성, 포격 소리, 차량, 군화, 무전, 확성기, 통화 등 긴장감을 높이는 효과에 집중했다. 특히 군홧발 소리를 위압감 있게 만들기 위해 상암과 일산 스튜디오의 다양한 장소에서 녹음을 진행했다.
장근영 미술감독은 12.12 군사 반란 직후의 다큐멘터리 영상을 참고해 "그날의 공기"를 비주얼 콘셉트로 잡았다. 육군본부 B2 벙커, 반란군의 본부인 30 경비단, 보안사와 수경사, 특전사령관실 등을 고증을 바탕으로 완벽하게 재현해 냈다. 특히 당시 군부대의 모습을 세세하게 구현하기 위해 실제 군사시설을 참고하고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았다.
3 특수 분장만 100시간
황정민은 전두광 역을 위해 100시간이 넘는 특수 분장을 감내했다. 모형을 5-6번 만들고, 가발도 6번 제작하는 등 캐릭터 완성도를 높였다.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탐욕의 끝을 보여주자"는 목표로 캐릭터에 몰입했다.
정우성은 이태신 역할에 대해 "불안하고 두려웠다"라고 고백했다. 김성수 감독은 정우성의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 시절 인터뷰 영상을 보며 이태신을 발견했고 캐스팅했다고 밝혔다.
영화 서울의 봄은 2024년 1월 기준 1,298만 4,746명의 관객을 동원했으며, 한국영화 역대 흥행 순위 6위를 기록했다. 또 개봉 41일 연속 일일 관객 수 10만 명 이상을 동원하며 역대 최장 기록을 세웠다.
서울의 봄은 제45회 청룡영화상에서 최우수작품상, 남우주연상(황정민), 편집상, 최다관객상 등 4관왕을 차지하며 수상에서도 쾌거를 거뒀다. 역사학자들은 "12·12 군사반란에 집중해 고증을 잘했다"라고 평가했는데, 특히 당시 상황을 시간대별로 정확하게 재구성했다고 칭찬했다.
영화는 젊은 세대들에게 아픈 역사를 알리고 대한민국 정치의 나아갈 방향에 관해 고민할 수 있는 시사점을 줬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정치를 넘어 인간의 탐욕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불법과 담합이 얼마나 무서운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